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누일 1세 (문단 편집) === 제위 계승 === 마누일 1세는 [[요안니스 2세]]와 [[헝가리 왕국]]의 왕녀 [[헝가리의 이리니]] 사이의 여덟째 자식으로, 넷째 아들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4남으로서 형이 셋이나 있던 상황이었으나, 1142년의 동방 원정 중 큰형과 작은 형이 연달아 죽자 제위를 가시권에 두게 되었다. 결국 1143년 원정 중에 [[킬리키아]]에서 아버지 요안니스 2세가 허무하게 죽자, 그는 진중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수도에 있던 삼남 이사키오스 대신 막내 마누일이 계승자로 선택된 이유로는 성정이 사나운 이사키오스보다는 마누일이 인격적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주력군의 회군을 안정적으로 이끌 제위 계승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이있다.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음모론이 자주 제기된다.]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마누일은 즉시 수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그의 계승이 확실히 인정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장례식을 살펴야 했으며, 제위 계승권이 있는 셋째 형 이사키오스와 삼촌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이사키오스]] 등의 다른 친족들을 견제해야했다. 마누일은 제국군 총사령관 [[요안니스 악수흐]]를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수도로 보냈다. [[파일:dennis-wong-manuel-i-komnenossmall.jpg]] 악수흐는 선황의 부고가 전해지기 전에 수도에 도착했다. 그는 신속하게 다른 제위 계승권자들의 신병을 확보했으며, 마누일의 지지자들을 포섭해놓았다. 덕분에 1143년 8월 마누일이 수도에 귀환했을 때, 그는 무난히 새로운 총대주교에게 제관을 받아 쓸 수 있었다. 그 후 자신의 제위가 확고해지자 다른 계승권자들을 석방했으며, 200파운드의 금을 교회에 보냈다.[* 제위 계승의 정황을 보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즉, 제위 계승권이 뒤쳐지던 다른 황자가 2년여 동안 장자 알렉시오스와 차남 안드로니코스를 죽도록 하고, 모종의 방법으로 황제를 죽인 다음, 진중에서 유력 인사를 포섭해 군대에 의해 황제가 된 것이라는 것. 후보는 요안니스 2세의 삼남 이사키오스와 사남 마누일 그리고 요안니스 2세의 동생 이사키오스(마누일의 사촌인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버지)이다.] 마누일이 요안니스 2세에게 물려받은 제국은 [[바실리오스 2세|1세기 전에 중흥기를 누린 뒤로]] 많이 변해 있었다. 노르만족은 남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지우고 있었으며, [[룸 술탄국]]은 여전히 소아시아 중부를 잠식하고 있었다. 발칸에서는 [[헝가리 왕국]]이 [[아드리아 해]]와 [[세르비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레반트에서는 [[십자군 국가]]들이 제국에 도전하고 있었다. 황제의 과업은 실로 벅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